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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지나는 공간


공간은 빛이 지나간 자리에서 시작된다. 빛은 에너지를 달리하며 여러 색으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지며 공간을 지난다. 빛이 시작된 자리가 움직이며 빛은 붉게도 푸르게도 바뀌어 간다. 적색편이(Redshift)는 관측자로부터 멀어지는 천체에서 방출되는 빛의 파장이 길어져서 가시광선 영역의 붉은색 쪽으로 치우치는 현상을 말한다. 별의 빛을 분해하면 특정 원소가 흡수하는 검은 선이 나타난다. 이 선의 위치는 실험으로 이미 알려져 있는데, 멀어지는 천체에서는 이 선들이 빨간색 쪽으로 밀려나있다. 파장이 변한다. 국소적으로 빛이 강한 중력장, 블랙 홀 주변을 빠져나오면서 에너지를 잃고 파장이 길어지며 적색편이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우주론적으론 거의 모든 외부 은하가 관측자로부터 멀어지고 우주 자체가 팽창함에 따라 그 공간을 지나는 빛의 파장이 함께 늘어난다. 적색편이 값이 클수록 그 천체는 관측자로부터 더 빨리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빛은 요동하며 일정한 속도로 공간적으로 퍼져 간다. 파동 속도(v)는 진동수(f)에 파장(λ)을 곱한 값이다. 빛의 속도는 일정하기 때문에 파장이 길어질 때 진동수는 줄어든다. 빛을 보내는 광원이 멀어지면 관측자 입장에서 빛의 마루가 도달하는 간격이 벌어진다. 정지 상태에서는 광원이 1초에 10번 파동을 보내면 관측자도 1초에 10번 받지만, 광원이 빛을 보내면서 동시에 뒤로 이동하면 다음 파동이 관측자에게 도달하기까지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따라서, 관측자에게 도달하는 빛의 파장은 길어지고, 결과적으로 진동수는 낮아지게 된다. 빛의 속도가 변해서 적색편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파장이 변했기 때문에 적색편이가 생기는 것이다. 반대로 천체가 가까워질 때는 파장이 짧아져 푸른색으로 치우치는 청색편이(Blueshift) 현상이 나타난다.

 

빛의 파장, 파동의 모양이 길어진 이유는 광원과 관측자간의 거리 때문이다. 빛을 뒤로 보내면서 관측자로부터 멀어지는 천체의 선형 운동이 빛 파동의 출발 점을 계속 뒤로 늦추기 때문에 파장이 길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빛이 광원에서 관측자에게 오는 동안 은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빛이 지나는 공간 자체가 늘어난다. 빛의 파장이 길어졌다는 것은, 그 빛이 지나온 공간 자체가 길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적색편이는 공간의 거리 변화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지표이다. 거리가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파장이 변하는 것이다. 우주 자체가 팽창할 때 은하는 가만히 있어도 그 사이의 공간이 늘어나면, 빛이 오는 동안 파장이 같이 늘어난다.

 

적색편이 현상은 광원과 관측자 두 지점 사이의 실제 거리가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빛은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 역할을 한다. 적색편이 현상이 두 지점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증거인 이유는 빛의 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이다. 빛의 파장이 2배로 늘어났다면, 빛의 속도는 일정해야 하므로, 이 빛은 원래보다 2배 더 늘어난 공간을 통과해 온 것이다. 따라서 은하 사이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진다. 빛의 파장이 변하는 현상 자체가 두 지점 사이의 공간적 거리가 변했다는 의미이다.

 

우주 팽창에서 '공간이 늘어난다'는 의미는 새로운 물질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물질들 사이의 간격(거리)이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주 전체의 일반적인 물질의 총량은 늘어나지 않는다. 은하와 은하 사이처럼 중력으로 묶여 있지 않은 거대한 공간들이 서로 멀어진다. 이로 인해 우주 전체의 물질 밀도는 시간이 갈수록 낮아지게 된다. 공간이 늘어나면 그 공간 자체가 가진 에너지인 암흑 에너지의 총량은 공간의 부피에 비례해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진공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질량을 가진 암흑 물질이 진공 곳곳에 퍼져 있다. 양자역학적으로 진공은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상태이며,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역동적인 공간이다. 우주는 더 텅 비어가고 있으며, 그 빈 공간은 암흑 에너지와 양자적 요동으로 채워져 있다.

 

우주의 밀도가 낮아져도 진공의 유전율과 투자율은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빛의 속도도 일정하게 유지된다. 물이나 공기 같은 물질 속에서는 원자와 분자가 빛과 상호작용하여 속도를 늦춘다. 물질의 밀도가 낮아지면 빛의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나 빛의 속도를 결정하는 진공의 유전율과 투자율은 공간 내에 원자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값이 아니라, 시공간 자체의 고유한 물리적 특성이다. 진공의 유전율은 우주에 존재하는 일반 물질의 밀도에 의존하지 않는 물리 상수로 취급된다. 우주가 팽창해서 은하 사이가 멀어져도, 그 사이를 채우는 진공 그 자체의 성질이 변한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우주 팽창으로 유전율이 변해 빛의 속도가 달라졌다면, 관측자는 먼 과거의 별을 볼 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물리 법칙을 관찰해야 하지만, 관측 결과 우주 초기부터 현재까지 물리 상수는 극히 정밀하게 유지되고 있다. 우주 팽창은 공간 속의 물질 밀도를 낮추지만, 진공의 성질(유전율)을 바꾸지는 않는다. 따라서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으며, 에너지를 잃은 빛의 파장이 길어지는 적색편이 현상만이 나타나게 된다.

 

우주의 밀도는 지난 138억 년 동안 엄청나게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유전율의 변화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두 가지 가능성을 시사한다. 첫째는 진공은 물질 밀도와 상관없이 시공간의 기하학적 구조에 고정된 상수일 수 있다. 둘째는 임계점이 현재 우주 밀도보다 훨씬 낮다. 우주가 지금보다 수조 배 더 팽창해야 유전율이 변하는 임계점에 도달할 수 있다. 현재 우주 팽창을 가속하는 암흑 에너지의 밀도는 매우 낮지만 일정하게 유지된다. 만약 암흑 에너지가 진공의 성질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라면, 우주가 계속 팽창하여 일반 물질 밀도가 암흑 에너지 밀도보다 훨씬 낮아지는 시점이 진공의 성질이 변화할 수 있는 물리적 후보 지점이 될 수 있다.

 

 

현대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 초기 인플레이션 시기에 진공의 에너지 상태가 급격히 변하며 물리 법칙이 결정된 적이 있다. 미래에 우주 밀도가 임계점 이하로 낮아져 진공의 기저 상태가 변한다면(거짓 진공 붕괴, False Vacuum Decay), 유전율을 포함한 물리 상수들이 계단식으로 점프하며 변할 가능성(물리 상수 가변성, Varying Fundamental Constants)이 이론적으로 존재한다. 물리법칙이 붕괴되는 극한의 지점인 플랑크 밀도(Planck Density) 근처에서는 유전율이 의미를 잃는다. 물리학적으로 진공의 유전율은 진공에서 가상 입자들이 생성 소멸하며 빛과 상호작용 하는 방식(진공 편극)과 관련이 있다. 우주 밀도가 극단적으로 낮아지거나, 반대로 에너지가 극도로 높아질 경우 진공의 상태가 변하는 위상 전이가 발생할 수 있다. 양자역학적 관점에서 우주 밀도 변화가 유전율의 불연속적(계단식)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물이 얼음이 되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상전이는 온도 변화에 의한 열적 요동으로 발생하지만, 양자 상전이(Quantum Phase Transition, QPT)는 온도가 절대 영도인 상태에서 압력, 자기장, 또는 화학적 조성 변화와 같은 비열적 매개변수를 조절함으로써 발생한다. 양자 임계점(Quantum Critical Point, QCP)은 양자 상전이가 일어나는 매개변수 공간상의 정확한 지점이다. 이 임계점에서는 상관 길이가 무한대로 발산(Scale Invariance)하며, 고전적인 상전이와는 다른 새로운 물리적 행동이 나타난다. 양자 임계점 근처에서는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양자적 요동(Quantum Fluctuation)이 시스템의 거시적인 특성을 지배하게 된다.

 

우주 밀도가 낮아져 진공의 위상 전이가 일어난다면 유전율이 계단식으로 변하고 빛의 속도도 바뀔 수 있다. 다만, 현재의 표준 우주론에서는 그 임계점이 아직 명확히 계산되지 않았으며, 관측상으로는 우주가 현재의 밀도에 도달할 때까지도 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