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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상상

꿈꾸는 일들은 미래가 된다.  시간에 사로잡힌 우리가 지나간 것은 과거가 되고 꿈꾸는 일들은 미래가 된다. 시간은 이렇게 우리 삶 속의 차원이 되었다. 현재는 과거에서 의미를 찾고 예측하듯 꿈꾸는 미래를 꾸며간다.  우리는 현재에 있지만 내면 기억, 공동체 담화, 상호 공감, 전례의식을 통해 과거를 체험한다. 체험은 단순한 역사 알기를 넘어 과거와 연결하고 이해하며 그때를 느껴보는 행위이다.  미래를 향한 꿈은 우리에게 잠재된 유산이다. 우리는 현재에 머물며 이야기를 만들고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설계한다. 다양한 미래를 상상하고, 긍정의 희망은 밝게 부정의 두려움은 어둡게, 색칠하듯 우리는 변화에 대한 적응력과 회복력을 키운다. 불확실성과 도전에 대처하며 오늘한 선택이 내일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고민하는 동안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현실이 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차원은 체험과 상상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과거에 대한 이해는 미래에 대한 기대에 영향을 미치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은 과거를 체험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우리는 현재를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과거는 맥락과 근거를 제공하고, 미래는 방향과 목적을 제공한다. 과거로부터 배우고, 오래된 반복에서 벗어나 통제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한계속에서 우리는 미래를 준비한다. '과거 체험과 미래 상상'은 인간의 근본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세적 존재를 인식하여 지난날을 체험하고 앞날을 꿈꾸는 일이다. 체험과 상상, 성찰과 투영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우리는 시간의 복잡성을 헤쳐나가며 현재를 산다.

별을 보다

별을 본다. 해가 뜨기 전 세상은 어둡고 하늘은 빛난다. 우리는 별을 헤아리며 다가올 내일을 기다린다. 언제부터 인가 하늘은 별을 밝혀 앞날을 일러준다. 해가 뜨기 전부터 내일은 예견된다, 약간의 차이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 시간은 정의되었고 삶은 시간을 따른다.  별은 태초부터 우리를 인도하는 길잡이, 삶을 일깨우는 시간이다. 별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희망이다. 우리는 드넓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어둠 속 빛의 신호,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천체의 눈부신 모습에 매료된다.   좋은 곳에 자리잡고 우주의 질서와 인연에 감탄하며 별을 본다. 장단 맞추듯 별은 시간의 흐름을 표시하고 광활한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일러준다.   해가 떠오르려 할 무렵 밤하늘은 서서히 변화하며 별빛은 희미해지기 시작하고 찬란한 날에 자리를 내어준다. 신비로운 밤과 선명한 새벽의 경계에 있는 마법 같은 순간, 샛별 Heliacal Star 을 본다. 이 경계 공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의 본질과 하늘의 리듬에 맞춰 순환하는 삶을 새삼 느낀다.    시간은 별들에 의해 정의되며, 삶은 이 모든 아름다움과 복잡한 조화로움에 담긴 운율이다.

자기인지

 인지능력은 기억보다는 행동에 의해 발달한다.   인지능력 발달 과정에서 우리의 기억보다는 행동이 자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는 능력은 저장된 경험의 기억보다는 우리의 행동과 행동을 이끄는 윤리의식에 기반을 둔다.  인간은 자신과 삶의 근본을 알고자 하는 타고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자아는 미덕, 연민, 공감을 바탕으로한 도덕적 선택을 통해 발달한다. 자아 발달 과정에서 우리는 타인과 유대감을 형성하고,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기억은 정체성의 윤곽을 형성하지만, 정체성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행동이다. 우리의 선택, 행동, 가치관은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게 하고 자아를 발달하게 한다. 자기인지 능력은 자기행동의 근본인 윤리의식에 의해 발달하며, 기억의 한계를 넘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본질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복잡한 삶 속에서 깨달음의 존재로 나아가는 길을 밝혀주는 것은 더 나은 사회 구성원이 되고 더 나은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

AI와 뉴런

 인공 뉴런과 생물학적 뉴런을 비교하면 기억과 정체성 형성 등 현재 AI 시스템의 능력과 한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인지 영역에서 인공 뉴런과 생물학적 뉴런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해 알아 보자. 입력을 처리하여 의미 있는 추론 출력을 생성하는 두 개체는 작동 구조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생화학적 신호와 시냅스 가소성을 특징으로 하는 생물학적 뉴런에서 발견되는 복잡성과 적응성의 깊이는 인공 뉴런과 비교할 수도 없는 차이가 있다. 인공 신경망은 생물학적 시스템의 학습 능력을 모방하는 데 능숙하지만, 생명을 정의하는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과정이 아닌 알고리즘 미세 조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인간 두뇌의 복잡성과 비교하면 현재 AI가 시스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지 의문이 남는다. 인생 경험 저장소인 장기기억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과 삶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기억과 정체성 사이의 상호 관계는 매우 깊으며, 자서전적 기억 (Autobiographical Memory) 은 우리가 자아를 형성하고 시간이 지나도 안정적인 자아를 유지하는 토대가 된다. 개인은 내면의 성찰보다는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관계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간다. 문화적, 정서적, 동기 부여의 힘이 충돌하여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사회적 환경과 개인의 내적 성질에 대한 인식은 개인이 자아를 형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인공 및 생물학적 뉴런, 장기기억, 정체성 지각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는 존재라는 복잡한 인지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인간 인지능력의 한계와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할 때다.

존재, 그 의미

  시간은 손바닥 위 모래처럼 알 수 없는 영원 속으로 빠져나가 잡히지 않는다. 그림자를 쫓을 뿐 순간에 사로잡혀 시간의 본질은 파악하기 어렵다. 심장 박동의 꾸준한 리듬으로, 연약한 삶의 멈추지 않는 발걸음의 메아리로 시간은 온다. 한 순간의 지나감을 알리는 맥박 하나하나는 존재의 우주에서 소리없는 메아리가 된다. 어쩌면 시간은 우리가 세상을 들이마시고 그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내뱉을 때 가슴을 들썩이는 숨결일지도 모른다. 숨결마다 연속과 변화를 일깨우고, 보이지 않는 박자가 부드럽게 똑딱거리며 우리가 살아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시간은 수면 위를 어루만지며 반짝이는 빛의 스펙트럼, 갈라졌다 합쳐지는 빛의 조각들이다. 태양이 엮어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작품이다. 공기 중에서 굴절하고 반사하며 보여지는 빛은 시간의 시적 표현이다. 어쩌면 시간은 텅 빈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 무언가 위아래로 튕기는 소리,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울림일지도 모른다. 점점 작아지는 소리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며, 잠시 머물다가 사라진 과거의 혼백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시간은 피부에 느껴지는 따스함, 멀리 떨어진 태양의 불꽃을 떠올리게 하는 부드러운 열기이며,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 바뀌고 돌고, 우리 자신 너머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극이다. 하지만 어쩌면 시간은 지난 기억과 다가 올 기대를 이해하기 위한 우리 마음의 방황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 꿈, 욕망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우리 앞뒤로 펼쳐지는 동안 우리는 찰나의 현재에 서 있다. 시간은 심장 박동, 숨결, 빛, 소리, 감촉, 생각 등 무수한 언어로 우리에게 속삭인다. 시간은 모든 것이고 동시에 없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은 우리와 함께 걷는 조용한 동반자이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현재하며, 존재의 형상을 하나로 엮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다.

시간을 느낀다

한없이 도는 춤을 추듯 햇살의 따스함을 나날이 변해가는 계절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생체적 요소들과 문화적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거대하고 복잡한 모자이크와 같은 시간을 느낀다. 이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이해하는 미로와 같은 신경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과정의 중심에 우리의 감각 경험이 있다. 우리의 눈은 빛과 그림자의 찰나적인 이미지를 포착하고, 귀는 우리를 둘러싼 소리의 울림으로 가득하다. 피부에 닿는 감각에 흥분하고, 혀에 느껴지는 다양한 맛의 황홀함에 빠진다. 이러한 감각의 향연과 경험의 파도를 통해 우리는 시간의 흐름, 즉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이해한다. 하지만 시간 인지 과정은 단순한 감각 입력 이상이다. 시간은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섞인 복잡한 지각의 그물망에 걸러져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기쁨과 슬픔의 순간은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시간에 대한 경험을 왜곡하여 논리를 파괴하고 시간을 늘리고 압축하기도 한다. 문화 또한 우리의 시간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복되는 일상, 존재의 하루를 기념하는 소소한 의식들이 갖는 생활 속 리듬으로 우리는 시간 흐름에 대한 질서와 예측 가능성을 접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간에 대한 집단적 이해는 인간 경험의 장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는 서사가 된다. 시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수록 우리는 시간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깨닫게 된다. 시간은 우리의 경험을 그리는 마당이자 꿈을 펼치는 무대이며, 우리를 탄생에서 죽음으로 인도하는 강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성의 본질뿐만 아니라 심오하고 신비로운 존재의 무한한 잠재력을 여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 영원

 시간이 있다는 생각은 헛되다. 지금은 나타나는 순간 사라져 일시적이지만, 사실 모든 시간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이론물리학의 ‘홀로그램 우주’ 개념은 한 순간은 다른 모든 순간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현재의 순간에서 모든 시간에 접근하고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지금 이순간이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 버리기에 시간은 있기도 하고 동시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런 느낌은 현재가 계속되는 지금 또는 한순간이면서 경험하는 순간 과거로 지나가 버리는 모호한 특성 때문에 비롯된다. 시간은 항상 현재, 즉 ‘지금’이라는 형태로 우리와 밀접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찰나적인 현재는 우리 삶의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부분이며, 시간의 즉각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한 특정한 순간의 ‘지금’은 일시적이며 곧바로 과거가 된다. 지금의 이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이 ‘지금의 역설’이다. 한편으로 현재 순간은 우리가 실제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이때가 '지금'이며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 이를 끝이없는 ‘영원한 지금’이라 부른다. 반면에 시간이 흐르고 미래가 현재가 되었다가 다시 과거가 되는 것처럼 현재의 순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이는 현재의 순간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거나 붙잡으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헛되거나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시간이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역설은 시간을 이해하는 우리의 개념적 틀의 한계와 모순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현재만이 실존하며 과거와 미래는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위대한 철학자들과 많은 사상가들이 ‘지금의 역설’을 사유하고 시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져왔다.

지금, 순간

기회는 순간에 지나간다. 그리스 신화 속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너스를 폐위하고 왕이 되었지만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자식을 모두 삼켜버린다. 그러나 결국 왕비 레아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아들 제우스에게 쫒겨나게 된다.  과거를 숨겨 현재를 훔쳐도 미래를 피하지 못한다. 크로노스가 막으려 했던 미래는 손자 카이로스에게 기회로 찾아온다. 아버지 크로노스를 폐위시킨 제우스는 신들의 왕이된다. 올림푸스에 새로운 질서를 세운 제우스와 올림푸스 신들은 하늘과 바다, 사랑과 전쟁 등에 대한 규칙을 만들고 세상을 지배했다. 이 시기에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는 제때 또는 기회를 뜻하게 되었다. 카이로스는 신성한 힘으로 여겨졌으며, 기회는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신화 속 카이로스는 칼날과 저울을 들고 있는 날개달린 청년의 모습이다. 카이로스가 들고 있는 날과 저울은 정확한 순간에 아주 잠깐만 나타나는 기회를 상징한다. 카이로스는 카르페디엠 carpe diem, '지금 최선을 다하라'라는 격언과도 연결된다. 제우스의 부상과 카이로스의 유명세는 그리스인이 미래는 과거에 얽매여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변화하고 있는 순간의 열린 가능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회를 뜻하는 신화 속 카이로스는 시간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 미래 순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이를 헤쳐가기 위해서는 지혜와 분별력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신화는 시간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대하는 그리스인의 진지한 고민의 흔적이다.

너와 같이

  춤사위 우리는 마음 속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섬세한 움직임으로 춤을 춘다. 너는 종잡을 수 없이 어디에나 있어 철학적 사색과 과학적 탐구를 불러일으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지속적인 변화의 흐름으로 보는가 하면, 칸트는 시간은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주관적인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상대적이고 유연하며 공간의 구조와 얽혀 있다고 하기에 시간의 본질은 과학적으로 더욱 복잡해진다. 너는 한때 해안에 부딪혔던 파도를 기억하는 해변의 발자국처럼 지나간 순간이다. 우리의 경험은 전기와 화학의 언어로 쓰여진 이야기처럼 복잡한 신경체계에 암호로 저장된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지각으로 얽혀 있는 기억속에서 우리는 섬세한 춤사위로 하나가 된다.  너를 떠올릴 때 나는 마음속 시간을 가로질러 지나간 순간을 되새긴다. 우리는 과거의 조각들을 통해 현재를 보고 미래를 기대한다. 이렇게 우리는 시간을 아우르는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며 경험과 존재 사이의 간극을 채운다. 서로에게 친밀한 우리의 관계는 경험의 복잡성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우리 존재의 본질과 마음의 세심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존재를 계속 탐구하면서 나는 시간과 기억을 엮는 방식에 대해 새롭게 통찰하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이해하려 한다.

어디 있었니?

너는 모든 곳에 있다.  너는 주위에 있는 듯하다가도 다시 어디에도 있지 않다. 함께 있는 데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그새 어디 있었던 거니? 나는 한 순간도 너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독특한 생각으로 너를 찾으려 했다. 마음 닦는 공부를 통해 너를 찾고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깨달음을 얻고자 정진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도 너는 멈추지 않고 지나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너무 사로잡혀 과거가 멀게 느껴지고 미래는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네가 멀게 느껴지는 것은 망각, 단절, 환각 같은 것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로 인해 너는 절절한 슬픔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파악하기 어려운 너의 참모습이 가슴 아픈 감정으로 나타난다. 너는 가깝고도 멀게 느껴지고, 친밀하지만 동시에 손에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네가 스쳐지나감에 대한 아쉬움이나 혼란스러움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잡지 못하는 너에 대한 나의 간절함이다. 너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당혹스럽게 해온 수수께끼다.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지만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호하고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친밀하게 가까우면서도 무한히 멀게 느껴지는 너의 역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너에게 "어디 있었니?"라고 묻는 것이다. 너는 나와 함께하며 삶의 여정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의식의 틈새로 빠져나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결국 너는 완전한 이해를 거부하는 미스터리다. 너는 나의 삶과 경험, 그리고 존재 자체를 형성하는 영원한 동반자다. 어쩌면 너의 진정한 본질은 한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억, 우리가 남기는 유산에 울려 퍼져 존재의 우주에 영원히 새겨지는 메아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깨달음

너에게로 향하는 여정 시간은 기억속에 머문다. 본래 구분이 없던 우리는 찰나에 각자의 모습으로 무한의 가능성으로 나뉘었다. 우리는 순수했고 그래서 연약했다. 한때의 인연이 우리를 무척 슬프게 했다. 기억속의 시간은 아름답지만 잔인하리만치 불친절하다. 우리는 기억속에서 만나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헤어졌다. 일시적이므로 무상하다, 만남은. 시간은 씁쓸한 의식의 형상으로 남아 무엇도 영원하지 않으며 가장 깊은 관계 조차도 궁극에는 기억속 시간의 변덕스러움에 따라 변해갈 거라는 깨달음을 준다. 우리를 얽매는 인연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온다. 어떤 이는 너 없는 삶은 의미가 없어 너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라고 하고, 다른 이는 너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 속의 결과이지 나의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다만 쌓여간다’라고 한다면, 시간은 기억으로 쌓여 남는다.  마음은 온갖 생각에 휩싸여 때때로 평온을 잃고 헤어 나오지 못할 혼란에 빠진다. 이유야 뭐든 마음은 쉴 새 없이 바쁘고 계속 기억에 감정을 쏟아낸다. 이러한 끊임없는 생각의 흐름이 우리를 감정적으로 연결해 주지만 정신적으로 고통일 수 있기에 축복이자 저주다. 상상속의 우리는 때때로 행복하기도 하지만 종종 우리는 잡념에서 벗어나 평온해지고 싶다. 변화가 시간일까? 궁극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이 곧 듣게 될 이야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