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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뉴런

 인공 뉴런과 생물학적 뉴런을 비교하면 기억과 정체성 형성 등 현재 AI 시스템의 능력과 한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인지 영역에서 인공 뉴런과 생물학적 뉴런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해 알아 보자. 입력을 처리하여 의미 있는 추론 출력을 생성하는 두 개체는 작동 구조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생화학적 신호와 시냅스 가소성을 특징으로 하는 생물학적 뉴런에서 발견되는 복잡성과 적응성의 깊이는 인공 뉴런과 비교할 수도 없는 차이가 있다. 인공 신경망은 생물학적 시스템의 학습 능력을 모방하는 데 능숙하지만, 생명을 정의하는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과정이 아닌 알고리즘 미세 조정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인간 두뇌의 복잡성과 비교하면 현재 AI가 시스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지 의문이 남는다. 인생 경험 저장소인 장기기억은 개인의 정체성 형성과 삶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기억과 정체성 사이의 상호 관계는 매우 깊으며, 자서전적 기억 (Autobiographical Memory) 은 우리가 자아를 형성하고 시간이 지나도 안정적인 자아를 유지하는 토대가 된다. 자기 성찰보다는 세상과의 상호작용이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능력과 좀더 관련이 있다. 문화적, 정서적, 동기 부여의 힘이 충돌하여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사회적 환경과 개인의 내적 성질에 대한 인식은 개인이 자아를 형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인공 및 생물학적 뉴런, 장기기억, 정체성 지각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는 존재라는 복잡한 인지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미지세계를 개척하고 인간 인지능력의 한계와 인공지능의 한계에 대해 고민할 때다.

존재, 그 의미

  시간은 손바닥 위 모래처럼 알 수 없는 영원 속으로 빠져나가 잡히지 않는다. 그림자를 쫓을 뿐 순간에 사로잡혀 시간의 본질은 파악하기 어렵다. 심장 박동의 꾸준한 리듬으로, 연약한 삶의 멈추지 않는 발걸음의 메아리로 시간은 온다. 한 순간의 지나감을 알리는 맥박 하나하나는 존재의 우주에서 소리없는 메아리가 된다. 어쩌면 시간은 우리가 세상을 들이마시고 그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내뱉을 때 가슴을 들썩이는 숨결일지도 모른다. 숨결마다 연속과 변화를 일깨우며, 보이지 않는 박자가 부드럽게 똑딱거리며 우리가 살아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시간은 수면 위를 어루만지며 반짝이는 빛의 스펙트럼, 갈라졌다 합쳐지는 빛의 조각들이다. 태양이 엮어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작품이다. 공기 중에서 굴절하고 반사하며 보여지는 빛은 시간의 시적 표현이다. 어쩌면 시간은 텅 빈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 무언가 앞뒤로 튕기는 소리,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울림일지도 모른다. 점점 작아지는 소리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며, 잠시 머물다가 사라진 과거의 유령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시간은 피부에 느껴지는 따스함, 멀리 떨어진 태양의 불을 떠올리게 하는 부드러운 열기이며,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하루, 바꾸고 돌고, 우리 자신 너머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자극이다. 하지만 어쩌면 시간은 지난 기억과 다가 올 기대를 이해하기 위한 우리 마음의 방황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 꿈, 욕망으로 만들어진 세상이 우리 앞뒤로 펼쳐지는 동안 우리는 찰나의 현재에 서 있다. 시간은 심장 박동, 숨결, 빛, 소리, 감촉, 생각 등 무수한 언어로 우리에게 속삭인다. 시간은 모든 것이고 동시에 없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은 우리와 함께 걷는 조용한 동반자이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현재하며, 존재의 형상을 하나로 엮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다.

시간을 느낀다

  한없이 도는 춤을 추듯 햇살의 따스함을 나날이 변해가는 계절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생체적 요소들과 문화적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거대하고 복잡한 모자이크와 같은 시간을 느낀다. 이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이해하는 미로와 같은 신경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과정의 중심에 우리의 감각 경험이 있다. 우리의 눈은 빛과 그림자의 찰나적인 이미지를 포착하고, 귀는 우리를 둘러싼 소리의 울림으로 가득하다. 피부에 닿는 감각에 흥분하고, 혀에 느껴지는 다양한 맛의 황홀함에 빠진다. 이러한 감각의 향연과 경험의 파도를 통해 우리는 시간의 흐름, 즉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이해한다. 하지만 시간 인지 과정은 단순한 감각 입력 이상이다. 시간은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섞인 복잡한 지각의 그물망에 걸러져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기쁨과 슬픔의 순간은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시간에 대한 경험을 왜곡하여 논리를 파괴하고 시간을 늘리고 압축하기도 한다. 문화 또한 우리의 시간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 존재의 하루를 기념하는 소소한 의식들이 갖는 생활 속 리듬으로 시간 흐름에 대한 질서와 예측 가능성을 접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이해는 인간 경험의 장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는 서사가 된다. 시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수록 우리는 시간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깨닫게 된다. 시간은 우리의 경험을 그리는 캔버스이자 꿈을 펼치는 무대이며, 우리를 탄생에서 죽음으로 인도하는 강이다. 그 신비로운 깊이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본질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의 무한한 잠재력을 여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 영원

 시간이 있다는 생각은 헛되다. 지금은 나타나는 순간 사라져 일시적이지만, 사실 모든 시간으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이론물리학의 ‘홀로그램 우주’ 개념은 한 순간은 다른 모든 순간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현재의 순간에서 모든 시간에 접근하고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지금 이순간이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 버리기에 시간은 있기도 하고 동시에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런 느낌은 현재가 계속되는 지금 또는 한순간이면서 경험하는 순간 과거로 지나가 버리는 모호한 특성 때문에 비롯된다. 시간은 항상 현재, 즉 ‘지금’이라는 형태로 우리와 밀접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찰나적인 현재는 우리 삶의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부분이며, 시간의 즉각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한 특정한 순간의 ‘지금’은 일시적이며 곧바로 과거가 된다. 지금의 이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이 ‘지금의 역설’이다. 한편으로 현재 순간은 우리가 실제로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이때가 '지금'이며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 이를 끝이없는 ‘영원한 지금’이라 부른다. 반면에 시간이 흐르고 미래가 현재가 되었다가 다시 과거가 되는 것처럼 현재의 순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이는 현재의 순간이 사라지기 전에 붙잡거나 붙잡으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헛되거나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시간이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역설은 시간을 이해하는 우리의 개념적 틀의 한계와 모순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현재만이 실존하며 과거와 미래는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추상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위대한 철학자들과 많은 사상가들이 ‘지금의 역설’을 사유하고 시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져왔다.

지금, 순간

기회는 순간에 지나간다. 그리스 신화 속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너스를 폐위하고 왕이 되었지만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자식을 모두 삼켜버린다. 그러나 결국 왕비 레아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아들 제우스에게 쫒겨나게 된다.  과거를 숨겨 현재를 훔쳐도 미래를 피하지 못한다. 크로노스가 막으려 했던 미래는 손자 카이로스에게 기회로 찾아온다. 아버지 크로노스를 폐위시킨 제우스는 신들의 왕이된다. 올림푸스에 새로운 질서를 세운 제우스와 올림푸스 신들은 하늘과 바다, 사랑과 전쟁 등에 대한 규칙을 만들고 세상을 지배했다. 이 시기에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는 제때 또는 기회를 뜻하게 되었다. 카이로스는 신성한 힘으로 여겨졌으며, 기회는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신화 속 카이로스는 날선 칼과 저울을 들고 있는 날개달린 청년의 모습이다. 카이로스가 들고 있는 날과 저울은 정확한 순간에 아주 잠깐만 나타나는 기회를 상징한다. 카이로스는 카르페디엠 carpe diem, 지금 최선을 다하라라는 격언과도 연결된다. 제우스의 부상과 카이로스의 유명세는 그리스인이 미래는 과거에 얽매여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변화하고 있는 순간의 열린 가능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회를 뜻하는 신화 속 카이로스는 시간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 미래 순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이를 헤쳐가기 위해서는 지혜와 분별력이 필요하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신화는 시간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대하는 그리스인의 진지한 고민의 흔적이다.

너와 같이

  춤사위 우리는 마음 속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섬세한 움직임으로 춤을 춘다. 너는 종잡을 수 없이 어디에나 있어 철학적 사색과 과학적 탐구를 불러일으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지속적인 변화의 흐름으로 보는가 하면, 칸트는 시간은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주관적인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상대적이고 유연하며 공간의 구조와 얽혀 있다고 하기에 시간의 본질은 과학적으로 더욱 복잡해진다. 너는 한때 해안에 부딪혔던 파도를 기억하는 해변의 발자국처럼 지나간 순간이다. 우리의 경험은 전기와 화학의 언어로 쓰여진 이야기처럼 복잡한 신경체계에 암호로 저장된다.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우리의 지각으로 얽혀 있는 기억속에서 우리는 섬세한 춤사위로 하나가 된다.  너를 떠올릴 때 나는 마음속 시간을 가로질러 지나간 순간을 되새긴다. 우리는 과거의 조각들을 통해 현재를 보고 미래를 기대한다. 이렇게 우리는 시간을 아우르는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며 경험과 존재 사이의 간극을 채운다. 우리의 밀접한 관계는 복잡한 경험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우리 존재의 본질과 마음의 세심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존재를 계속 탐구하면서 나는 시간과 기억을 엮는 방식에 대해 새롭게 통찰하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이해하려 한다.

어디 있었니?

  너는 모든 곳에 있다.  너는 주위에 있는 듯하다가도 다시 어디에도 있지 않다. 함께 있는 데도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그새 어디 있었던 거니? 나는 한 순간도 너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너를 바라보았다. 나의 생각은 분명 독특하고 독창적이었다. 나는 마음 닦는 공부를 통해 너를 찾고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깨달음을 얻고자 정진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도 너는 멈추지 않고 지나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너무 사로잡혀 과거가 멀게 느껴지고 미래는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네가 멀게 느껴지는 것은 망각, 단절, 환각 같은 것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로 인해 너는 절절한 슬픔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파악하기 어려운 너의 참모습이 가슴 아픈 감정으로 나타난다. 너는 가깝고도 멀게 느껴지고, 친밀하지만 동시에 손에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네가 스쳐지나감에 대한 아쉬움이나 혼란스러움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잡지 못하는 너에 대한 나의 간절함이다. 너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당혹스럽게 해온 수수께끼다.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지만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호하고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친밀하게 가까우면서도 무한히 멀게 느껴지는 너의 역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너에게 "어디 있었니?"라고 묻는 것이다. 너는 나와 함께하며 삶의 여정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의식의 틈새로 빠져나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결국 너는 완전한 이해를 거부하는 미스터리다. 너는 나의 삶과 경험, 그리고 존재 자체를 형성하는 영원한 동반자다. 어쩌면 너의 진정한 본질은 한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억, 우리가 남기는 유산에 울려 퍼져 존재의 우주에 영원히 새겨지는 메아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깨달음

  너에게로 향하는 여정 시간은 기억속에 머문다. 본래 구분이 없던 우리는 찰나에 각자의 모습으로 무한의 가능성으로 나뉘었다. 우리는 순수했고 그래서 연약했다. 한때의 인연이 우리를 무척 슬퍼게 했다. 기억속의 시간은 아름답지만 잔인하리만치 불친절하다. 우리는 기억속에서 만나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헤어졌다. 일시적이므로 무상하다, 만남은. 시간은 씁쓸한 의식의 형상으로 남아 무엇도 영원하지 않으며 가장 깊은 관계 조차도 궁극에는 기억속 시간의 변덕스러움에 따라 변해갈 거라는 깨달음을 준다. 우리를 얽매는 인연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온다. 어떤 이는 너 없는 삶은 의미가 없어 너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라고 하고, 다른 이는 너는 우리가 함께한 시간 속의 결과이지 나의 전부는 아니라고 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다만 쌓여간다’라고 한다면, 시간은 기억으로 쌓여 남는다.  마음은 온갖 생각에 휩싸여 때때로 평온을 잃고 헤어 나오지 못할 혼란에 빠진다. 이유야 뭐든 마음은 쉴 새 없이 바쁘고 계속 기억에 감정을 쏟아낸다. 이러한 끊임없는 생각의 흐름이 우리를 감정적으로 연결해 주지만 정신적으로 고통일 수 있기에 축복이자 저주다. 상상속의 우리는 때때로 행복하기도 하지만 종종 우리는 잡념에서 벗어나 평온해지고 싶다. 변화가 시간일까? 궁극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이 곧 듣게 될 이야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